"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베드로의 다짐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에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모두 도망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서서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을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호언장담 후에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며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는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제서야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 주님 앞에서 약속을 하고 죄를 짓는 우리 역시 느끼는 것입니다. 살면서 천주교 신자인 것을 부끄러워 숨긴 것, 사순시기 주님께 단식, 기도, 자선을 약속하고 온갖 이유로 지키지 않은 것,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나는 힘든 것은 하나도 지지 않으려는 우리 마음은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삶을 진실하게 살려는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시인 윤동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고백합니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 웨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베드로 역시 부끄런 고백을 돌이켜 볼 때마다 슬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눈을 들여다 보시자 베드로는 알몸이 된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은총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죄를 짓고 부끄러움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인간 외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없는 짐승들은 공포와 고통은 알지만 수치는 모릅니다. 오직 인간만이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입니다. 시인은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 뒤 정지용 시인을 찾아가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때 정지용 시인은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내 죄와 이기심, 교만에 대한 부끄러움,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님께 대한 부끄러움, 언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었습니까?
그러고보면 베드로의 마음은 시인의 마음입니다. 죄 때문에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 부족하고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안고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가장 인간적인 베드로가 우리입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윤동주 '별헤는 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우리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분은 혼자가 아니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지만 내 마음 한켠에 있는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예수님과 함께 성주간 십자가의 길을 같이 걷고자 합니다. 혼자 걸어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입니다. 그분의 삶은 한편의 서시이자 나를 위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