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눈
강론

새로운 눈

2026.04.05
김 하상바오로 신부
새로운 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성대한 잔치를 열고 초대 임금이 된 것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조선 개국 공신인 원효대사가 같이 있었는데 술과 흥에 취한 이성계는 "대사, 그대 얼굴이 꼭 돼지 같구려."하고 농을 건넵니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대답합니다. "임금님, 임금님 얼굴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농에 정색을 하고 다른 대답을 하는 원효대사에게 이성계는 화를 내며, "짐은 그대를 돼지라고 놀렸는데 어찌 그대는 나를 부처라고 하는가?" 그러자 원효대사가 말합니다. "임금님, 부처에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눈에는 무덤만 보였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빈무덤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요한 20,9)입니다. 돼지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 부처가 보일리 없듯이 무덤만 바라보는 이에게 부활이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무덤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죄, 미움, 증오만이 아니라 전쟁, 폭력, 불공정으로 그 결말은 죽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다면 새로운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피에몽이란 마을에는 부활절 아침이면 모든 사람들이 산속 샘에 가서 자신의 눈을 씻는 전통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사순시기 동안 단식, 기도, 자선을 하면서 무언가 평소와 다른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길에서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모든 생명이 살아나는 봄이 왔는데 꽃과 봄바람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은 예수님 부활을 느끼고 있습니까?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 이웃을 보고 있습니까? 토마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 겟쎄마니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어느날 루이빌에 볼 일이 있어 나왔는데 그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루이빌 쇼핑센터, 4가와 월넛가의 코너에서 나는 갑자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나의 사람들이며 나는 그들의 사람으로 서로가 완전히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서로에게 낯설지 않았다…하느님께서 친히 육화하신 그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홀로 거룩하게 떨어져 있다는 환상은 꿈이며, 모든 사람이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가운데 걷고 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그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전쟁도, 증오도, 잔인함도, 탐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특별한 은총으로만 믿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특별한 은총으로만 믿고 이해할 수 있는 것, 여러분은 그것을 보고 있습니까? 어둠 속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을 보고 있습니까? 새로운 눈으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부활을 통해 하나됨의 기쁨과 구원된 인간으로서 차오르는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까? 부활은 마치 어두운 방에 갑자기 불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불이 켜진 방에서 우리가 할 일은 눈을 크게 뜨고 새로운 것들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새로운 눈을 뜨십시오.